요가로 나를 만나고, 문장에 나를 담다
[ 요가로 나를 만나고, 문장에 나를 담다 ] (1) 다라나
2020. 11. 25 | 배혜진
 

안녕하세요. 배혜진입니다.

우선 첫 주 수업이 끝나고 과제 안내가 많이 늦어져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올려요. 지난 일요일 3시, ‘요가로 나를 만나고, 문장에 나를 담다’ 첫 수업을 마치고 제 안에선 여러 가지 물음이 많았어요. 통째로 날아가버린 것만 같은 2020년 끝자락을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담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고민에서 출발한 수업이었습니다만. 글과 요가를 함께하는 수련은 정해진 시간 안에 요가와 글을 완벽하게 5:5로 해내기란 사실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첫 수련을 마치고 설렘과 염려가 공존하더라구요. 그러나 그것마저 욕심과 조바심에서 기인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썬데이나마스떼에서 처음 시도해보는 이 4주를, 우리가 같이 만들어가는 수련으로 삼고 한 주 한 주 내 몸과 마음을 돌볼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주어진 현재를 감사하며 보낼 수 있도록, 저와 함께 ‘다라나’해요.

1.

이번주 글쓰기의 제재는 다라나(Dhrana)입니다. 다라나는 ‘응념’이란 뜻으로, 집중력을 한데 모으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가령 비행기를 아주 좋아하는 어린 아이가 난생 처음으로 비행기 모형을 만들게 됐을 때의 몰입 상태를 상상해보면 우리는 다라나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다라나는, 요가의 8단계 중 6단계에 해당하며 깊고 고요한 명상으로 나아가는 과정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11월 22일, 첫 번째 수련에서 ‘숨 바라보기’를 주제로 느리게 몸을 움직이고 마음이 다른 곳으로 이탈하는 일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했어요. 그리고 매트 위에서의 다라나 연습이 일상에서도 가능해질 수 있도록, 요가를 내 삶으로 초대하는 힘을 기르자고 이야기했죠. 

 

어떤 대상에 사로잡혔을 때,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지금 이 순간을 오롯이 살아가는 힘이 부족해지곤 합니다. 우리가 매트 수련을 통해 궁극적으로 기르고자 하는 것은 좋고 나쁜 기복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고요하고 평온하게 ‘현재’를 살아가는 힘이에요. 사념에서 벗어나 내가 있는 여기에 응념하는 것이요. 함께했던 70분의 수련을 통해 숨 바라보기를 연습했고, 이제 그것을 일상에서 얼마나 적용해볼 수 있는지를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첫 번째 시즌 첫 주차 수업이다보니 여러 가지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런 것 저런 것 떠나 서로 다른 우리가 이곳에 모여 각자의 다라나를 이야기하는 장이 열렸다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다행스러운 것 같아요.

 

2.

이번주에는 여러분 일상에서의 다라나,를 자유롭고 안전하게 펼쳐내주세요. 한 편의 이야기여도 좋고, 생각날 때마다 써주셔도 좋겠습니다. 덧붙여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라는 물음에 자기만의 답을 보태 적어주시면, 앞으로 남은 3주 동안 기록할 현재를 더 선명하게 기획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왜 쓰는가, 라는 물음에, 내면의 담화를 거쳐 문장으로 남겨주시면 29일 수련에서 더욱 의미있는 글-요가 시간을 만들 수 있겠습니다. 그럼, 우리가 그날 이야기했던 것처럼 자유롭고 편안하게,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맘껏 풀어내주세요. 29일 수련에서 만나요.

이한님(HANNIMetta)
2020-11-28
[ ‘다라나’고 싶다. ‘다라나’하고 싶다. ] 생리 이틀 차에 첫 수련을 하게 됐다. 요가복을 입을 때부터 속옷 라인이 신경 쓰였다. 한 자세에 길게 머물며 호흡을 느끼니 내 몸인데도 이물감이 느껴졌다. 쏟아지는 머리카락과 흔들리는 시선, 조금씩 변하는 몸의 각도와 움직임, 생리대 때문에 어색한 속옷 라인까지. 나는 자꾸만 흐트러짐을 경계하고 올바르게 정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 ‘다라나 하자.’고 생각했다. 머무름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라나는 무슨,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이 올라왔다. 나는 여전히 ‘다라나’를 생각하느라 ‘다라나’ 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꾸로 몸을 뒤집어 천장을 보고 있으면서 두 발로 서서 정면을 보던 때를, 생리대를 하지 않은 이틀 전 내 몸을 기억하고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을 깨닫는 시간을 보냈다. 최근에는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 머릿속이 복잡했다. 의욕과 호기심, 설렘과 두려움에 다양한 계획을 짜느라 어느 것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념과 감정이 일어나니 현재의 내 상황에도 답답함을 느꼈다. 고정적인 출·퇴근 시간과 공간의 제약, 직업적인 한계와 내가 원하는 삶과 현재의 괴리감이 순간순간 찾아왔다. ‘떠오르는 영감을 붙잡으려다가 지금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됐고, 생각을 단어와 문장으로 바꿔보았다. 둥둥 떠다니던 것들을 직접 마주하면서 응념 해나갔다. 글자를 바라보며 코끝에 의식을 모았다. 글자들 안에 내가 너무나 많은 감정을 눌러 담았음을 깨달았다. 번뜩이는 영감에서 뿌리칠 수 없는 사념으로 바뀌는 데에는 아주 짧은 시간과 적은 에너지만으로 충분했다. 그럴 때 다시 호흡하기를 반복하며 내 안에 있는 것을 온전하게 바라보기 위한 시간을 가졌다. 있는 그대로를 마주하니 지금의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할 용기와 에너지가 생겼다. 그렇게 얼마 전부터 나를 위한 글쓰기를 시작했다. 나는 언제나 나의 있는 그대로를 옮겨낼 방법을 갈망해왔다. 갈망하는 만큼 숨기고 싶은 마음도 컸다. 두 마음의 충돌은 언제나 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갖게 했고, 확인받을 방법을 찾아 헤맸다.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고, 도대체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 모를 때 글을 썼다. 내가 달아나고 싶을 때 ‘다라나’하게 만드는 힘, 수많은 사념 속을 비집고 나와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게 하는 방법이었다. 휘몰아치는 문장들을 적어 내려가다가 또 다른 생각으로 바빠질 때 즈음에 손끝의 감각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글쓰기는 내가 ‘다라나’할 때임을 울리는 경종이었다. 나는 여전히 다양한 감정과 상황의 기복에 영향을 받는다. 그때 호흡에 다라나하면 쿵쾅거리던 심장이 차츰 잔잔해지고, 생각이 내가 아니고 감정도 내가 아님을 되새길 수 있는 찰나가 마련된다. 글을 쓸 때도 나에게 온전히 다라나하는 연습을 한다. 지금 이 순간도 다라나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 글을 읽을 누군가를 의식하고 나의 글이 평가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나의 속앓이를 드러낸다는 창피함이 내가 응념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만 같다. 그래서 다시 다라나한다. 나에게 이런 두려움이 있음을 알고 있고, 인정한다. 보여주고 싶은 마음만큼 숨기고 싶은 마음이 크다는 것을 알고 인정한다. 생각과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나의 지금만이 진실이고, 온전하다는 것을 다시 나에게 말해주는 용기를 낸다.
인생여행자
2020-11-28
매트에 등을 대고 누운 자세에서 두 다리를 넓은 V자 모양으로 길게 뻗어낸다. 배꼽을 등 뒤 방향으로 힘껏 잡아당겨 복부에 힘을 가득 불어넣는다. 이 자세로 골반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가를 몇 번 하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다리도 복부도 덜덜 떨려온다. ‘아, 더 이상 다리를 들고 있을 수 없다.’, ‘너무 힘들다, 힘들어.’ 그 생각과 함께 어느덧 내 두 손은 양쪽 허벅지 안쪽으로 달려가 진동하는 다리를 몸으로 당겨온다. 채 3분도 되지 않는 이 시간, 다라나(Dhrana)를 경험한다. 바른 자세로 앉아 호흡에 집중하며 명상하려고 했던 한 시간 동안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에 표류했던 조금 전의 나와는 달랐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지금, 여기’로 와있는 나를 발견한다. 집중력을 한데 모으는 마음, ‘응념’을 뜻하는 ‘다라나’는 Flow(몰입)과 맞닿아있는 개념인 것 같다. 외부의 상황과 내면의 생각,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온 마음이 다 가있는 상태. 시공간의 제약을 벗어나 오롯이 현존하는 나를 마주하는 경험. 요가의 아사나를 취하면서 몸을 적극적으로 쓸 때 마음도 따라 초점이 맞춰주는 경험을 하곤 한다. 마치 돋보기로 햇볕을 한데 모을 때 불을 붙일 수 있는 것처럼. 이 짧은 글을 쓰면서도 ‘나는 왜 글을 쓰는가?’에 대한 질문의 답을 슬며시 엿보게 된다. 먼저, 나의 감정과 생각을 풀어내다 보면 간결해진다. 뿐만 아니라 글을 써 내려가는 그 시간, 아사나를 해나갈 때처럼 ‘지금, 여기’로 나를 데려온다. 그런 경험이 쌓여가다 보면, 때론 흰 화면에 까만 글자를 채워가는 과정이 고행처럼 느껴지다가도 매혹적인 글쓰기를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나’를 써가다 보면 잘 정리하여 타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타자와 나의 감정과 생각을 나누고 싶고 공감받고 싶어서다. 그런 경험들이 누적되다가 어느 순간 내 안의 새로운 바람을 마주했다. 어떤 책 제목처럼 ‘나의 글이 이 세상을 1밀리미터라도 바꿀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쓴다.
해나
2020-11-28
호흡에 다라나 합니다.라고 이번 주 과제를 받았다. 일상에서 들숨과 날숨에 집중했지만 얼마 가지 않았다. 월요일이 지나고 수요일이 되었을 때, 나는 이미 다른 사람이 하는 말. 행동. 그리고 생각에 나를 맞추느라 내 호흡은 잊었다. 한 주가 끝나는 토요일쯤 매거진에 올라온 글을 다시 보며 호흡 그리고 다라나에 대해 떠올렸다. 내가 평소에 대화할 때. 행동할 때. 심지어 대답할 때도 나 자신보다 상대방의 호흡에 맞춰서 대답했구나. 상대방 속도에 맞춰가다 보면 호흡이 가파르거나, 혹은 반대로 상대방이 내 호흡을 느끼지 못할 때도 문제가 된다. 문뜩 든 생각을 글로 여러 번 옮겨보면서 내 호흡이. 내 감정이. 내 생각이 모두 건강했는지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진다. 요가를 하면서도 좀 더 나 자신에 다라나 해보자.
mango
2020-11-29
[ 변덕에 건네는 주문, 다라나 ] 나는 좀 변덕스럽고 부산한 편이다. 내게 말 거는 모든 소리에 자주 방해 받는다. 심지어 그 방해를 즐길 때도 있다. 무언가에 집중하고자 마음먹은 즉시 ‘누가 방해 좀 해주었으면’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면서 막상 방해받으면 툴툴대니, 참 웃기는 인간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방해해온 걸 텐데. 어쩌면 다라나의 계기가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집중해야지’ 한다고 해서 집중이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생각처럼 마음이 따라오질 않으니 이러고 있는 것 아니겠나. 4주간 수련과 글쓰기를 병행하며 적어도 생각과 마음이, 나아가 행동이 가까워지는 사람이 되길 빈다. 그런 점에서 ‘무엇으로 다라나 할 것인가’는 흥미로운 물음이다. 글쎄, 무엇이 있을까? 눈앞에 손가락을 세워 응시할 수도 있겠고, 자기만의 주문을 읊조려볼 수도 있겠고, 좋아하는 향을 맡을 수도 있다. 뭐든 간에 나에게 가장 효과 좋은 도구를 찾아 나가는 여정은 기쁨으로 가득하다. 지난 일요일, 우리는 각자의 움직임 속에서 몸을 자연스레 넘나드는 호흡을 도구 삼았다. 감정이나 생각이 모르는 새 침입하려 할 때, 그것을 알아차린 즉시 몸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소리를 일정하게 유지하려 시도했다. 미약한 소리가 마치 부화하듯 애쓰고 있었다. 귀 기울이자 소리는 점점 더 견고하고 깊어졌다. 소리가 들리니 몸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도 보였다. 자세가 겉보기에 정확한지 살피느라 정작 몸의 감각을 놓치던 평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몸이 지금 무얼 하고자 하는지, 내가 그것을 존중하며 따라가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수련이 끝나고 한 주가 시작되자, 선명했던 내 호흡은 도시의 소음에 묻혀버렸다. 빼곡한 사람들 사이에서 호흡에 허용된 공간은 고작 마스크 한 움큼이었다. 그 공간만큼 마음의 자리도 줄어들었고, 또다시 시선과 감정을 여기저기 빼앗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달라진 게 있다면, 나만의 다라나 도구를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주말 아침, 요가 수업 대신 달콤한 늦잠에 숨고 싶을 때 ”다라나”. 퇴근길, 마음에도 없던 맥주가 갑자기 당길 때 “다라나”. 나 자신과의 약속을 피하고 싶을 때 “다라나”. 책임지지 못할 빈말을 하게 될 때 “다라나”. 다라나는 내가 나아갈 원래의 방향으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어느샌가 변덕이 비집고 들어올 때, 집중의 파괴를 순순히 허용하는 나를 발견하자. 그리고 가만히 주문을 외어보자. “다라나”
써니텐
2020-11-29
1주차 - 다라나(Dhrana) 마음을 한 데 모아 응념, 집중하는 것, 다라나. 이 말을 듣자마자 ‘아! 나한테 필요한 건 바로 저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이리저리 휩쓸리고 끈기 있게 집중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내면의 힘을 길러야지, 길러야지 다짐만 하던 나였기 때문이다. 매번 다짐만 할 뿐, 자꾸만 딴 생각, 딴 짓으로 빠지는 나를 보며 한 때는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도 생각했었다. 요가를 하며 숨에 다라나 해야하는 순간에도 계속해서 이내 딴 생각으로 휩쓸리곤 했었던 나였기에. 글쓰기를 하고 싶었던 이유는 사실 요가를 하고 싶었던 이유와 동일하다. 머릿속의 수많은 생각과 고민들을 잠시라도 잊고 어딘가에 몰입되고 싶었기때문이다. 요가를 할 때에는 자세에 집중하고, 글쓰기를 할 때에는 ‘씀’에 집중한다. 그 잠시잠깐의 몰두하는 순간들이 좋았다. 정확히는 그렇게 몰두되는 내 모습이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쨋든 의지박약 인간인 나는 내돈내산을 통해서 새로운 일을 찾고 또 새로운 행위를 강제로 시킨다. 글쓰기 요가를 통해 어떻게든 주1회 글(끄적임에 가깝지만)을 써내고 요가를 하며 수련을 하고 싶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다라나를 마음 깊이 이해하고 다라나의 상태가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