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로 나를 만나고, 문장에 나를 담다
[요가로 나를 만나고 문장에 나를 담다] - 시즌2
2021. 1. 24 | 배혜진
 

1/24 1주차 - 삼스카라(Samskara)

1/31 2주차 - 사바사나(Savasana)

인생여행자
2021-01-24
삼스카라(Samskara) ‘내 안에 머물고 있는 작은 아이에게’ 삼스카라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가 두 가지였다. 수영장 한 편에서 어깨를 움츠리고 카메라 앵글 바깥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초등학교 남자아이의 모습이 하나였고, 다른 하나는 완벽해지려고 노력하면서 되짚어보며 그 주변을 맴도는 마음이 조급해진 ‘어른이’의 모습이었다. 어릴 때 수영장을 가본 적이 별로 없었다. 제2의 엄마처럼 늘 곁을 지키셨던 할머니는 맏손주가 위험한 활동 하는 걸 매우 싫어하셨다. 당시 대가족 체제에서 실질적 서열 1위셨던 할머니의 입김에 어머니도, 나도 그 뜻을 꺾기엔 턱없이 힘이 부족했다. (물론 내가 떼 썼으면 해주셨을 수도 있는데 어린 나는 특히나 더 순응적이고 순종적인 아이여서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수영장, 스케이트장, 스키장을 거의 가보지 못했다. 물에 빠질 수도, 손이 베이거나 허리를 다칠 수도,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을 맞닥뜨리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랬기에 지금까지 크게 다친 곳 없이, 건강하게 살아왔고 지금도 이렇게 숨 쉬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삶의 모든 장면에 명암이 있듯이, 안전한 삶을 살아오긴 했지만, 그 여파로 도전에 취약해졌다. 특히 몸을 적극적으로 써서 새로운 걸 시도하는 스포츠 활동에 소극적으로 바뀌었다. 지금 떠올려보니, 평발이라는 신체적 결함(?)으로 달리기를 잘 못 했던 것도 한몫했고, 한창 축구를 즐기던 초등 4학년 시절의 자책골 경험은 확실히 하향 변곡점이 되었다. 그럼에도 걷거나 뛰는 걸 기반으로 하는 운동은 잘 못 해도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수영은 전혀 다른 영역의 일이었다. 먼저, ‘겁 없이 물어 들어갈 수 있어야’ 하는데 대학 시절 물에 빠질 뻔한 경험이 있었던 이후로는 더욱 물이 무서워졌다. 일단 물에 들어간다고 해도 ‘물에서 숨을 쉴 수 있어야’ 하는데, ‘음~파~ 음~파~’만 연신 해댔지 물에서 숨쉬기란 불가능에 가깝게 여겨졌다. 두려움과 좌절이 온몸을 감싸고 파고들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수영장에서 어깨 움츠리고 카메라 앵글 바깥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초등학교 남자아이의 모습’이다. 오래된 앨범에 꽂혀 있는 사진 한 장이기도 한데, 그 어린이가 늘 내 안에 어딘가에 살고 있다가 내가 두려워할 때, 취약한 상황이 될 때면 수면 위로 올라와 나를 압도한다. 몸을 움직여서 나의 존재를 드러내거나 자존감을 높일 수 없던 나는 부지 부식 간에 공부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앎의 기쁨으로 학습 자체가 재미있을 때도 있었지만, 부모님 등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큰 동기였다. 스스로 세워놓은 학습 목표를 달성하고자 노력했고, 주변 친구들을 보면 경쟁심을 갖기보다는 나 자신과 싸움이라는 생각으로 공부를 했다. 그러다 보니 중학교 시절 대부분을 이른바 ‘전교 1등’으로 살았다. 학창 시절,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으로 산다는 건 안 좋은 점보다는 좋은 점이 더 많다. 선생님들과 주변 어른들에게 칭찬받을 일이 많았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정받았으며 자연스럽게 얻게 되는 권력 같은 것도 있었다고 추억한다. 마치 어른들 사이에서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지위에 따라 파생되는 권력처럼 학생들 사이에서는 그런 권력이 분명 존재했다. 나 역시 그 권력을 보이게, 보이지 않게, 의식하면서, 의식하지 못한 채 휘두르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러던 중 특목고 고입을 준비하며 이삼 년 앞서 선행 학습을 해온 내 또래 아이들을 학원에서 만나게 되었고, 지금까지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다는 걸 발견했다. 몸이 아닌 머리를 기반으로 쌓아온 자존감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덧 나는 나 자신과 경쟁하지 않고, 주변 또래들을 의식하며 그들과 경쟁하고 있었다. 늘 시간의 압박 속에서 살았으며, 그 강박의 흔적이 지금까지도 내 몸에 커다란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완벽에의 충동’을 가슴에 품고 살다 보니 어느 순간 내 마음속 용수철이 그 탄성의 한계를 넘어서서 ‘팅~’하며 늘어져 버렸다. 표면적으로 내 삶이 부서지진 않았지만, 지칠 대로 지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끌려가듯 꾸역꾸역 살아낸 시간이 꽤 길었다. ‘완벽해지려고 노력하면서 되짚어보며 그 주변을 맴도는 마음이 조급해진 어른이’의 모습은 그렇게 온전히 나의 삼스카라가 되었다. 매트 위에서 요가 수련을 할 때도 이 두 가지 삼스카라가 너울지는 파도처럼 쉴 새 없이 떠오르고 진다. 깊은 호흡을 내쉬고 마시면서 떨쳐내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오랜만에 이 아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살며시 안아본다.
핸도🦉
2021-01-27
꼭 고해하듯이 이 말을 하고 싶다. 나는 사실 적당주의자이다. 평소에 적당히 살기 때문에 적당히 해야 될 순간에 열심히 하게 되는 것이다. 여름방학 내내 놀았기 때문에 방학 마지막 날에 방학 숙제를 몰아서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적당주의라고 말해버리면 그 단어가 꼭 부정적인 기운을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적당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 적당이란 단어가 현신한다면 그는 수완이 좋은 사람일 것이다. 어디까지가 적당함인지 파악하는 감각이 뛰어날 것이기에 모자라거나 넘치는 일 없이 분수에 알맞은 자세로 자신의 과업을 묵묵히 수행해 나갈 것이다. 그가 사기업에 입사한다면 평사원 출신으로도 임원직을 넘볼 것이고 공무원 시험을 본다면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5급 사무관이 될 것이다. 그러니 사실 나는 적당주의라는 말을 쓸 자격이 안 된다. 평사원으로 출발해 현대카드 임원이 되신 나의 이모부가 적당주의자라 불릴 자격이 있다. 그는 싫어하겠지만. 진정한 적당주의자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나는 결과론적 적당주의자라는 말을 만들어낼 참이다. 노력하는 인간을 꽤 여럿 만났다. 개중 한 명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기도 했다. 한 사람의 개인사를 내가 멋대로 성공과 실패로 재단할 수야 없겠지만, 내가 아는 노력하는 사람은 모두 그들이 원하는 바를 어느 정도 이뤄낸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보통 말이 없이 움직였다. 원하는 것이 있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행위를 했다. 그리고 반복했다. 그 행동 양식이 때로는 본능에 따라 욕망을 해소하는 동물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노력으로 안 되는 일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경험상 노력이란 걸 하지 않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나의 친구 이 군은 얼마 전에 내게 이런 얘기를 했다. ‘심해지면 심해졌지 나아지지는 않는 게 인생이더라고’ 이 군의 하루 일과는 출근 후 퇴근 후 침착맨 유튜브 시청 및 위쳐3 플레이 후 취침으로 알고 있다. 당연히 나아지지 않지 친구야. 나는 열심이란 걸 고등학생 때 교내 스타크래프트 대회 이후로 해보지 않은 기분이다. 피곤함을 모른 채 밤새 게임을 했고, 모니터에 게임 전략을 덕지덕지 붙여놓고 수학 공식 외우듯이 달달 외웠다. 예선에서 탈락했다. 노력으로도 안 되는 일이 있는 걸까? 잘못 노력한 게 아닐까? 저그가 아니라 테란을 연습했으면 예선은 통과하지 않았을까? 그 이후로 약 이십여 년간 내가 열심히 했노라고 당당히 공표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나의 수험 생활, 대학 생활, 개인 작업, 직장 생활 등 되돌아보면 노력의 밀도가 솜사탕보다도 낮다. 더 열심히 할 수 있던 순간들이 듬성듬성 보인다. 그것 가까이에 눈을 갖다 댄다면, 건너편이 훤히 보일 만큼 성기다. 과거에 대해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손흥민 DNA를 타고났다면, 밀도 높은 인생을 진작에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 나에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을 준다고 해도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나는 같은 방식대로 살 것이기 때문에. 그러다 보니 결과론적 적당주의자가 되어버렸다. 나는 나대로 그럭저럭 잘 살아가고 있다. 나 개인에겐 최선이지만 이상적인 기준에 못 미치는 노력을 해 가면서. 그러나 나도 소위 말해 ‘김연아의 발바닥’을 만들어내는 이상적인 노력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그것을 좇다가 중간에 적당히 만족해버릴 뿐이다. 내가 진정으로 궁금한 것은 이것이다. 김연아의 노력은 나도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인가? 아니면 선천적인 재능일 따름인가? 전자의 가능성 때문에 괴롭다. 차라리 적당의 현신이 내게 와서 “넌 안돼” 라고 속삭여줬으면 싶다. 그러면 현재의 내가 나의 최선 상태라는 사실에 안도하고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하.
인생여행자
2021-01-31
죽음을 향해 어떻게 가고 싶으세요? ‘어떻게 살아가고 싶으세요?’의 다른 질문 https://brunch.co.kr/@promisee/77 *오늘 혜진샘 수업에 참여하며 ‘사바아사나’와 관련해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담아봤어요 :) ——————————————————————————————————— 죽음을 향해 어떻게 가고 싶으세요? ‘어떻게 살아가고 싶으세요?’의 다른 이름 요가 수련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꼭 해본 경험이 있는 아사나가 있다. 바로 ‘사바아사나’로, 우리말로 ‘송장 자세’다. 처음 단어 뜻을 들었을 때 ‘송장도 자세가 필요한가?’라는 우스운 질문도 들었었는데, 말 그대로 망자의 자세, 망자의 모습을 말한다. 숨을 몰아쉬며 어려운 아사나 플로우를 모두 마치고 맞이하는 사바아사나는 진정 ‘꿀맛 같은 휴식’이다. 모든 요가 수련은 결국 이 사바아사나를 향해 가는 길이다. 요가 수련을 매번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여정의 체험이라 표현해도 크게 틀리지 않은 이유다. 제2의 엄마로서 늘 옆을 지키셨던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지금도 또렷하다. 입관 전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그녀의 자세도 ‘사바아사나’였다. ‘나도 언젠가 이 모습으로 누워있겠지?’ 막연하지만 선명한 질문을 품게 된 것도 그즈음이다. ‘태어나면 모두가 죽는다.’는 문장처럼 참인 명제는 없다. 학교 다닐 때부터 들어서 익숙했던 말이지만 이 문장을 가슴에 품은 건 어른이 되고 나서다. 좀 더 정확하게는 이 문장을 마음에 담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제목의 아툴가완디 책을 깊이 읽어냈던 시절이 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책도 함께 탐독했던 그때 역시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사람이란 존재는 참 미련하게도 가까운 사람이 떠나고 나서야 그 사람의 소중함을 절감한다. 그제야 죽음의 문제를 개념의 영역에서 내 삶의 영역으로 데리고 온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깊게 묻고 되묻다 보니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로 질문이 바뀌었다. 그제야 삶은 죽음에 기반을 둘 때 비로소 빛난다는 사실을 매만지게 되었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한 번뿐인 내 삶을 어떻게 할 것인가?’ 마음에서 휘돌아 나오는 이 질문들을 마주할 때면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든다. 답을 유보하고 싶은 충동은 습관이라기보다는 본능에 가까워 보인다. 그럼에도 나는 이 질문을 직면할 것이다. 더욱더 마주하고 비벼대고 주물러서 내 삶에서 살아 움직이는 물성이 있는 무엇으로 만들어 낼 것이다. 타일러 라쉬의 ‘두 번째 지구는 없다’를 펼쳐서 몇 장 읽는 사이 내 흥미는 쉽게 휘발되고 말았다. 나의 삶을 내밀하게 바라보고 하루하루 투쟁하며 살아내기에도 버거운 내게, 전 지구적인 과제 ‘기후 변화’를 가슴에 품기엔 너무도 거시적이고 먼 이야기만 같았기 때문이다. 영화 ‘퍼스트 리폼드’의 앞부분에 나왔던 인물도 스쳐 지나갔는데, 그는 기후 변화 위협으로 극도의 공포를 느끼며 자식을 낳는 것도 두려워했고 절망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했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품기에는 너무 먼 과제 같다는 파편적인 인상을 여러 콘텐츠에서 받고 했다. ‘내 꿈은 기후 위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라고 외치는 타일러 라쉬의 말이 멋지게 들리긴 했지만, 나의 삶과는 거리가 꽤 먼 것처럼 느껴진 이유도 거기에 있다. 당면하는 일상의 삶의 과제들이 산적해 있는데, 지구의 다른 지역 이야기나 미래에 펼쳐질 ‘6도의 멸종’ 같은 시나리오는 내 머리나 마음에 둘 자리가 없는 것이다. 호기심으로 관심을 두는 차원의 일은 할 수 있다. 일종의 유희 활동처럼 말이다. 하지만 삶을 추동하는 핵심 주제로 삼기에 나는 그리 전 지구적이지도 미래지향적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확실히 아는 것 한 가지가 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어느 날부터인가 손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머리에서부터 가슴까지 절절히 알고 있다. 가깝게는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들부터 내가 속한 커뮤니티, 지역사회, 사회, 국가, 세계로 확장되면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고 경험한다. 더는 사회, 경제, 정치 이슈에 한눈을 감고 살지 않는다. 내 이웃의 문제이고 결국 나의 과제가 될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신경을 쏟고 싶지 않다. 지금 상황이 얼마나 절박한데, 고작 목소리 내길 주저하겠는가.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게 목소리를 못 낼 이유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중략) 완벽할 수는 없다. 완벽한 것도 필요 없다. 다만 깨어 있고 그 방향으로 계속 가는 게 중요하다.’ 이 문장을 만났을 때 내 마음은 공명했다. 내가 가고자 하는 삶의 방향을 명확히 짚어낸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타일러 라쉬는 기후 위기 문제 해결을 그 방향으로 잡았을 뿐 마음의 기반은 나와 같구나 싶었다. 움켜쥐듯 살기에 삶은 허무하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레처럼 나의 명예, 부, 권력, 건강 모든 건 어느 순간 나를 떠날 것이다. 심지어 손에 쥐고 있다고 느끼는 그 순간조차 불안과 염려,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혀 있다. 영원히 변치 않는 가치, 나란 존재의 자산으로 남을 수 있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만이 진정한 ‘내 것’일 것이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성실과 온유와 절제’처럼 변하지 않을 가치가 내 삶에 투영되어 나를 통해 나타날 때 그 삶의 열매만이 영원하다고 믿는다. 나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리라. 그런데 나는 나약하다. 매일 좌절하고 실패하고 절망하며 괴로워한다. 이상과 현실의 틈에서 고민하고 부유한다. 혼자라면 외롭고도 외로울 것이다. 바로 고꾸라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삶의 여정을 함께 하는 도반이 있기에, 떨리는 두 무릎을 굳게 세워 앞으로 걸어 나갈 힘을 얻는다. 서로를 향한 위로와 사랑이, 응원과 나눔이 나를 살게 하고 너를 살게 하고 우리를 함께 살게 한다.
이한님(HANNIMetta)
2021-02-06
[나는 언젠가 죽는다, 그래서 지금 살아있다.] 죽음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나는 언젠가 죽는다.’고 되뇌면서 머리로 이해하기 위해 꽤 노력했다. 어느 날 꿈을 꿨는데 내가 곧 죽을 것을 알게 됐다. 시간이 부족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남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마음이 조급했다. 비상금을 모아둔 통장의 비밀번호도 알려줘야 하고, 오늘 아침 출근하던 신랑에게 다정한 인사를 못 한 것도 떠올랐다. ‘진작 준비해둘걸.’이라는 후회를 하면서 엄청나게 바삐 뛰어다니다 잠에서 깼다. 꿈을 곱씹으면서 내가 죽음을 생각보다 더 두려워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정확히는 죽음 직전에 남은 미련이 나를 괴롭게 했다. 또 다른 날 꿈에는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순간이었다. 장이 꼬이듯 움츠러드는 순간에 ‘나는 죽는다.’고 두 팔을 활짝 벌렸다. 하늘을 나는 듯하다가 아름다운 바닷가에 코만 살짝 부딪힐 정도로 부드럽게 떨어졌고, 죽지 않았다. 잠에서 일어났는데 개운하고 벅찬 감정이 올라와 곧바로 꿈속의 해변을 옮겨 그렸다. 죽음 앞에서 느낀 극과 극의 의식과 감정을 통해 죽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싶다는 절박한 마음이 들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삶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한다. 어둠을 통해 빛이 존재함을 알고, 죽음을 통해 지금 살아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두 가지가 함께 존재해야 하나의 온전한 동전이 된다. 둘 중 하나만을 취사선택하고자 하면 온전한 하나의 동전은 영원히 가질 수 없다. 그런데도 동전을 갖고 싶어하는 집착이 괴로움을 만든다. 주변을 살펴보니 수많은 것들이 삶과 죽음으로 귀결된다. 수치심, 분노, 슬픔, 두려움 등의 감정은 버림받는 느낌, 즉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는 죽음을 의미한다. 기쁨, 행복, 설렘 등은 희망찬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지금까지 좋은 느낌을 주는 감정을 많이 갖고 싶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피하거나 버리려고 해왔다. 그런데 기쁨의 동전을 선택하면 뒷면에 있는 슬픔도 선택하는 것임을 알게 됐다. 이 사실을 알기 전까지 왜 자꾸 나를 괴롭게 하는 일이 있는지 억울함과 분노를 느꼈다. 지금도 느끼기 싫은 감정이 올라오면 피하고 싶다. 하지만 감정을 느끼는 순간순간에 휘둘리기보다 사실은 그것들이 하나이고, 내가 삶의 온전함을 느낄 수 있도록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죽음’을 둘러싼 알 수 없는 공포, 두려움, 무지함을 걷어내고 죽음은 이미 내게 머무른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나의 존재가 곧, 온전한 ‘삶’ 자체임을 또렷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죽음의 때를 자연스럽게 알고, 떠날 준비를 할 수 있을 만큼 맑은 영혼으로 살아가길, 주어진 순간에 충실히 살아감으로써 아쉬운 조각을 남기지 않길, 내가 죽은 이후 남은 이들이 슬픔보다 충만한 사랑을 느끼길 소망한다.
세영
2021-02-06
처음 사바아사나가 시체 자세라는 것을 알았을 때 기분이 묘했다. 시체라니. 사실 그것을 알기 전에 사바아사나는 요가 선생님께서 한 시간 동안 나를 빡세게 굴리셨으니 너덜해진 육신, 몇 분이라도 좀 쉬라고 주신 시간이라 생각했는데 이것도 나름의 자세였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생각해봤다. ‘그래 나는 시체이다’ 마치 어렸을 적, 자는 척하다 정말 잠들었던 경험처럼 최선을 다해 죽은 척을 해본다. 몸에 힘을 푼다고 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남아있던 힘이, 긴장이 그제서야 빠진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편해진다. 결국 나는 이렇게 모든 힘을 빼버리고 싶어서 그 힘든 아사나들을 견뎠는 지도 모른다. 그런데 웃긴것은 사바아사나 자세가 가끔은 그 어떤 자세보다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힘을 주고 사는 것이 기본값이 되어버린 몸은 힘을 빼라고 해도 어떻게 빼야하는 지 알 수 없다. 더 많이 힘주고, 더 많이 갖는 것에만 집중 하는 세상에서 내려놓고 빼는 일은 너무 어색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바아사나처럼 힘 좀 풀고 살아야겠다. 어깨의 승모근처럼 마음에도 꽝꽝 뭉쳐버린 여유들을 조금씩 풀어서 부드럽게 만들어줘야 할 것 같다.
핸도🦉
2021-02-09
머리서기를 시도하며 정말 많이 넘어졌다. 등판을 바닥에 쿵하고 통째로 떨어뜨린 적도 있고 앞구르기 하듯이 둥글게 내려와 가뿐한 적도 하고 옆으로 어정쩡하게 쓰러져 벽에 부딪힌 적도 있다. 벽에 대고 연습하고 싶다가도 벽을 두고 연습하다가 벽이 없어졌을 때 막연해 질까봐 걱정돼서 못한다. 여럿이서 할 때 괜히 긴장돼서 잘 못 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여럿이 있는 것에 경쟁심이 생겨 잘 될 때도 있다. 버틸 수 없을 때까지 견디다가 위험하게 내려오지 말고 차라리 적당할 때 안전히 내려오라는 선생님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서 버티다가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지기 일쑤다. 목이 꺾일까봐 두렵고 허리를 삐끗할까봐 두렵고 떨어질 때 아플까봐 두렵고 어제보다 오늘 더 못할까봐 두렵다. 하루도 마음 편히 머리서기를 시도한 적이 없다. 무게중심이 탁 하고 풀리는 순간, 바닥으로 쏟아지고 나서 허탈한 마음에 웃음이 난 적은 있지만, 아무렇지 않게 씨익 웃어본 적은 없다. 양손과 머리, 두 발보다 많은 숫자로 땅을 지지하고 있는데, 왜 거꾸로 서는 게 어려울까? 어쩌면 머리서기는 근지구력이나 유연성이나 균형 감각 따위로 하는 것이 아니라 똑바로 서 있다는 (다만 뒤집혀 있다는) 믿음으로 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마음으로 다시 시도해보았다. 100프로의 마음으로 믿지 못해서 그런지 여전히 양발로 서는 것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어렵다. …다…렵…어 냥그 건 는하 로꾸거 .다없 가유이 엔것그 ?고냐드힘 왜 게 는하 로꾸거 .다있 가내 에래아 기서리머 .다니아 …아 (중 기서리머) ?나있 가나사바사 면니아 도것그 ?나있 가세자기쟁 ?나있 가기서깨어 ?가는있 가누 에래아 기서리머 럼그 .다한 로요필 을상대 할림군 .다없 수 할재존 로으적립독 은왕 ?고라이왕 의나사아 가기서리머
인생여행자
2021-02-13
시르사아사나 _ 운전면허학원에 한창 다니던 시절, 가장 멋있게 보였던 사람은 텔레비전 속 셀럽이 아니라 운전면허학원 셔틀 승합자 운전기사님이었다. 좁다란 언덕길을 기어 변경까지 능수능란하게 하면서 한 손으로 핸들을 휙휙 돌리는 그 모습은 참 멋져 보였다. 요가를 시작한 지 꽤 되었지만, 다시금 몰입해서 매일 요가 시작한 지 70일째 되는 나에게 가장 멋져 보이는 모습을 꼽으라면 ‘시르사아사나를 부드럽게, 여유롭게 취하는 선생님의 모습’일 거다. 그만큼 쉽지 않아 보이고 감히 다가서기 어려워 보이는 자세여서일 게다. _ 이런 말을 또박또박하고 써 내려가는 나 자신도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게 있다.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 날 나도 흔들림 속에서나마 시르사아사나를 해나갈 것이라는 걸. 그러다가 익숙해지고 여유가 생기면 핀차마유라아사나를 마음에 품게 되리라는 것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긴 삶의 여정에서 마주하는 작고 큰 산봉우리들이 있다. 바라만 봐도 압도되는 ‘태산’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시르사아사나가 지금의 내겐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잘못 자세를 취하다가 혹시나 목이나 허리를 다치지 않을까, 그러다가 짧게는 요가 수련 못하지 않을까, 길게는 장애를 입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의 그늘이 길게 드리워진다. 그 두려움의 저변에는 죽음이 자갈처럼 깔려있다. 통증으로 대변되는 고통의 이면에는 죽음에 대한 본원적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시르사아사나는 사바아사나와도 맞닿아있다. _ 명확하게 기억해내지는 못하지만 어린 시절 어느 날부터 두 발을 딛고 일어선 이후로 바로 서는 건 당연한 일이 되었다. 요가 자세로 말하자면 타다아사나일텐데 (이 역시도 쉽지 않지만, 보통은 일견 쉽게 느껴진다.) 시르사아사나와는 대칭점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바로 서기와 머리 서기(달리 말하면, 거꾸로 서기) 그 이름만큼 멀리 있는 것만 같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무엇이 바로 서는 것이고 무엇이 거꾸로 서는 것인가? 쉽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인가?’ 되묻게 된다. 이 지점에서 떠올리게 되는 단어가 ‘드리시티’이다. ‘응시점, 초점’으로 풀이할 수 있는데, 그 지점 기준으로 보면 ‘바로 서는 것’과 ‘거꾸로 서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시선이 어떻게 전개되고 펼쳐지는지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은 같은 것이다. _ 시르사아사나를 시도할 때 죽음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느끼게 된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두 발을 지면에서 떼기 어려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팔과 머리로 기반을 든든히 채우고 드리시티를 또렷이 가져갈 때 엉덩이와 두 다리가 가볍게 올라간다. 마치 수영을 배울 때 처음 물에 뜨는 경험을 할 때처럼 내 몸이 가볍게 느껴지고 새롭게 여겨진다. 그러다 보면 결국 어느 순간 타다아사나와 시르사아사나는 같은 결의 아사나가 될 것만 같다. 기반만 다를 뿐.